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승천하락
    카테고리 없음 2024. 5. 28. 21:20

     

     1

     아스타리온은 문을 열었다. 달큰한 냄새가 집안을 떠돌고 있었다. 그 외 특이 사항은 없다. 고급스러운 양탄자, 오래된 느낌의 고풍스러운 가구들, 압도적인 크기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벽시계,

     그리고 굳게 닫힌 문.

     아스타리온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말라 일렀지만 아마 몇 번쯤은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저 문 안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존재의 목을 따버리기 위해서. 물론 모두 실패했으며 그들은 제 발로 걸어 돌아가지 못했다.

     벽시계는 정오를 가리켰다. 사랑하는 달링, 밥 먹을 시간이네...

     그는 문을 열었다.




     2

     갓 짜낸 피가 가장 신선하다는 사실은 뱀파이어가 아닌 이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법한 상식이다. 그런 이유로 아스타리온은 그 방 안에서 사냥감을 직접 손질했다. 단도로 사냥감의 맥을 끊은 아스타리온이 흐르는 피를 와인잔에 담았다. 영 깔끔하지는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오에는 죽은 이처럼 뻣뻣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스타리온이 나가기 전과 조금도 달라진 모습이 없었다. 오, 재미없기는... 죽기 위한 발악이라도 해준다면 뜯어말리거나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을 텐데. 오에가 향하는 방향의 끝에는 영원한, 고요한 잠― 다른 말로 하면, 점진적인 죽음이 있었다. 그야말로 재미없음의 극치라고나 할까.

     적어도 그런, 최악으로 지루한 결말은 피하고자 이 짓을 억지로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아스타리온은 지금 상황이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이의 모든 것― 목숨마저도 제 손안에 넣고 마음대로 굴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개인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추악한 욕망을 채워 주었으니까. 그는 오에의 살짝 벌어진 입술 앞으로 피가 담긴 잔을 들이댔지만, 오에는 그쪽으로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았다.

     “달링, 난 시체랑 하는 취미는 없는데.”

     그러니까 조금은 덜 시체처럼 굴어도 되지 않을까? 자기야. 투덜거리고 싶은 듯,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아스타리온은 잔에 담긴 피를 제 입에 머금고 상체를 침대 위로 숙였다. 곧 창백한 입술과 오에의 버석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맞닿았다. 마른 입술을 피로 축이며, 잡아먹을 듯이 입안에 머금고서, 그는 제 입안에 담긴 피를 오에의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오에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런 일방적인 입맞춤 뒤에, 입안에 남은 피의 잔향은 어쩐지 처음 머금었을 때보다 더 달콤했다. 아스타리온은 피를 대충 삼킨 뒤 다시 칼을 들었다. 잔을 새로 채웠다. 

     오에는 반항하지 않았다.




     3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옛날의 여느 밤처럼, 그들은 자연스럽게 몸을 섞었다. 분위기를 잡겠답시고 마신 위스키 한 잔. 창백한 그의 얼굴에도 약간은, 취기가 오른 티가 나고. 아스타리온은 축 늘어진 채 꿈쩍하지도 않는 오에의 손을 끌어당겨 부드럽게 핥는다. 손에서부터― 애정을 담아 목덜미를 콱, 깨물기까지. 오에는 반항하지 않았다. 목덜미에 맺혀서 흐르는 피를 아깝다는 듯 핥아낼 때, 오에의 몸은 반사적으로 흠칫 떨릴 뿐 그 이상의 반응은 없다.

     섹스는 뻔하다. 특별할 것 하나 없다. 비틀린 애정을 담은 입맞춤. 침대 시트를 그러쥐고 있는 오른손과 아스타리온의 등을 쥐어 잡고 있는 왼손. 낡았는지 적당히 삐걱거리거나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는 침대. 아스타리온의 품에 안겨있는 오에는 마치 그 옛날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승천 의식도 전, 우리가 본격적으로 모험을 시작할 때쯤의, 어딘가 우울하고 무기력해 보이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해야 할까.

     아스타리온의 눈이 오에를 본다.

     오에의 얼굴을 본다. 잠에 취한 듯한 표정. 파트너와의 달콤한 섹스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쾌락도 딱히 상관없다는 듯, 그저 목숨줄이 붙은 채로 살아 있는 이상 어떤 표정이라도 지어야 하니까 짓는다는 듯한 표정. 달링, 예전의 자기는 지금보다는 더 쾌락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제가 하는 왕복 운동이 그다지 버겁지도 않다는 듯한 그 표정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의 행위는 점점 더 격렬해져 간다. 감당하기 버거운 쾌락으로 오에를 짓누르고 싶어서.

     달링, 마음 가는 대로 해, 참지 말고. 지어 보라고, 예전처럼 불건전한 표정 말이야.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다시 보면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제 나는 불쾌해하지도, 서운해하지도 않아. 재미있어할 뿐이지! ―오에의 무기력함을 쾌락으로 굴복시켜 그 우울함의 가면을 깨 버렸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겠지만.

     그러나 그날 밤도 아스타리온은 오에에게서 열에 들뜬 신음 이상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하고 만다. 달링,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오에의 짧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면서, 그는 속삭인다.




     4

     은총을 잃기 전의 오에를 기억한다. 그 뻔뻔한 상판이 반가워 보일 때가 다 있던가요. 천박한 어휘를 품위 있게 말하는 이상스러운 재주가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그에 반응하지 않고 미소 지었을 뿐이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오에는 아마도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음대로 하라지, 달링.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일에 열중하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식탁에 앉아 와인을 땄다. 오에는 접시에 가지런히 담긴 석류를 아스타리온의 입에 넣어주면서 불건전한 소유욕을 가득 담아서 웃었다. 제가 무슨 위험한 생각을 하는지, 딱히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야 그때의 오에는 생각한 바를 그대로 입 밖으로 내곤 했으니까.

     “우린 같이 지옥에 떨어질 거예요.”
     “같이 간다면 어디든, 달링.”

     아직도 오에가 무슨 생각으로 지옥, 같은 시시껄렁한 단어를 입 밖에 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런 건 별 상관없었다. 그 앞에 붙은 ‘같이’가 더 중요했으니까. 같이 지옥행이라, 그거 재밌겠네! 지옥엔 자기보다 끔찍한 것들 많겠지?

     “그래도 당신보다 더한 건 없을걸요.”
     “그럼, 있으면 섭섭하지.”

     그러나 오에는 끝내 혼자서, 저 혼자만의 지옥으로 굴러떨어졌다.




     5

     벽시계는 정오를 가리켰다. 달링, 밥 먹을 시간이야.

     오에는 여전히 공허한 눈을 하고 있지만, 웬일인지 스스로 일어나 앉아 있다. 어디가 불편했는지, 혹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는지. 아스타리온은 미소 지으며 오에를 도로 침대에 얌전히 눕혔다. 와인잔에 담긴 피를 제 입에 머금고 상체를 침대 위로 숙였다. 두 입술이 맞닿고 오에의 목구멍으로 피가 흘러 들어간다.

     오에를 가만히 놔두면 언젠가는 기운을 차릴까? 모르겠다. 영원히 저러고 있을지도. 그러나 점진적인 죽음이 재미없는 것처럼, 점진적인 회복 또한 재미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자기야, 어디 재미있는 짓이라도 해줄 게 아니라면 영원히 그러고 누워서 벌레처럼 삶을 영위해 주지 않겠어? 오직 내 손에만 의지해서, 오직 내 입술에만 의지해서. 그러면 거기서 오는 소소한 만족감이라도 즐길 수 있을 테니. 요즘의 달링은 너무 재미없어서, 여기서 더 재미없어지면 정말 죽여버리고 싶어질 것 같단 말이지...

     아스타리온이 오에의 감은 눈꺼풀 위로 입을 맞추었다. 그가 오에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는 꼭 같은 지옥에 떨어질 거야.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