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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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클시클 2024. 10. 11. 21:17
며칠 전부터 전등이 깜빡이는 듯하더니 기어코 불이 나가버렸다.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다. 그는 전등을 갈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그저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것뿐인. 며칠간 전등불의 깜빡임을 무시해 온 그 꾸준함을 가져다 앞으로의 어둑함을 무시하는 데 써먹으면 그만이다. 흔해 빠진 우울감, 흔해 빠진 무기력, 흔해 빠진 사랑이 그가 앓는 질병의 이름이던가. 그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간 일이 없었다. 그에게 인간관계란 먼저 다가온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게 사기꾼이든, 사이비든, 좀도둑이든, 혹은 아주 아주 드물게도 진짜 사랑꾼이든, 간에,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목적을 이루면 떠난다는 것.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남의 목적을 이루어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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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클시클 2024. 6. 5. 20:48
시온은 그 자신이 상식적인 인간이라는 데서 오는 자부심을 어느 정도 가지고 살아왔다. 그때까지는. 그때라고 함은, 그가 클로에는 감히 상상도 못 할 법한 뒷세계의 루트를 통해 인육을 처음 접했을 때를 말한다. 그가 이러고 있음을 클로에가 안다면 그녀는 화를 낼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 나중에 스스로 고해바칠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클로에는 대체 무슨 젠장맞을 세계의 법칙이 당신더러 그런 짓을 하게 밀어붙였느냐고 따지겠지. 그리고 거기에 대고 그냥 당신의 입맛이 궁금해서요, 라고 대답하는 건 상당히 쪽팔린 일이 될 것이다. “친구, 그럼 맛본 뒤에 연락 달라고. 생각보다 입맛에 잘 맞을지도 모르니까.” 시온은 귀찮음이 절절히 묻어나는 고개 끄덕임 한 번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불법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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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툴로에시클 2024. 5. 12. 14:50
그는 인간을 싫어한다. 별로 비밀스러운 사실은 아니다. 이미 그의 얄팍한 인간관계 내에서는 그가 끼니보다 더 잦은 횟수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런 생각이라 하면 또 종류가 제법 많은데 대표적인 것만 예로 들자면― 인간 다 죽었으면 좋겠다든지. 아니 인간이 이제야 다 죽어서 뒤늦게 허겁지겁 없어지실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라든지, 멸망? 지구 멸망? 하지만 지구가 무슨 죄가 있다고 멸망까지야. 깔끔하게 호모사피엔스 종만 이 넓은 우주에서 깔끔하게 사라졌으면 좋겠다. 저 멀리 은하 너머 하여튼 어딘가에 외계인인지 뭔지 뭐 다른 생물체가 있든 말든, 지구에 남은 생물체가 뭐가 됐든. 싫어하는 이유를 굳이 또 짚고 넘어가자면 시간 낭비이겠지마는. 그는 따지자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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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시클 2024. 5. 1. 01:17
오늘은 클로에가 689일 만에 집에 돌아가는 날이다. 원래 이렇게나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처음 계획은 여섯 달 정도. 여섯 달 정도만 떨어져 있어도, 시온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클로에는 이미 숱한 시도 끝에 자신이 계속 곁에 있는 한은 시온의 마음이 강해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클로에를 향해 보이는 심한 의존증과 집착. 그런 그의 관심이 클로에로서는 싫지 않았지만, 이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클로에가 곁에 없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인연은 영원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큰맘 먹고 집을 떠나 여섯 달 동안 세상을 혼자 여행하려 했는데― 세상일이란 게 다 그렇지 않던가. 이런 일이 생기고, 저런 일이 생기고, 하여튼 어떠어떠한 복잡한 사정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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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클 파이널시클 2024. 3. 17. 12:58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본 것은 조그만 구체였습니다. 저― 멀리 하늘에 떠오른 구체는 세상으로 차가운 빛을 흩뿌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름다움에 취해 무작정 그리 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무심코, 작고 꿈틀거리는 생명을 밟아 짓이겨버린 모양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그 작은 생명의 눈으로 그 구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눈으로 보는 그 구체는 너무 아름다워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더 큰 생명을 탐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더 큰 생명을 잡아먹을 때마다 그 생명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다가, 마침내는 두 발로 걷는 동물을 잡아먹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지금껏 잡아먹은 모든 생명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미, 쥐, 토끼, 여우, 호랑이... 인간. 저 아름다운 구체의 이름은 달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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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클 2024. 3. 8. 16:09
7 그는 최근, 화를 내고 싶은 욕구가 끓어오를 때마다 이를 악물고 속으로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의 내용을 1장부터 헤아리는 버릇을 들였다. 어떠한 사실을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것은 속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만큼이나 탁월한 진정 효과를 발휘했다. 그렇게 그는 일주일도 안 되어 17권의 책 내용을 복습한 참이었다. 이대로 그동안 읽은 책 내용을 모두 복습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는 하루쯤 가출해 버릴 용의도 있었다. (물론, 그래봤자 완벽하게 그의 손해밖에는 안 될 것이다. 나간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이 집으로 다시 기어들어 오고야 말 테니까) “클로에, 쉰다는 게 뭔지 잘 모르죠?” 그가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물었다. “살면서 아파 본 적도 잘 없을 테고?” “잘 들어요. 당신은 여기 침대에 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