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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빌런au
    1차 2024. 1. 13. 20:30

     

     골목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들뜬 듯 활기찬 목소리와 그에 대비되는 진지한 목소리가 좁은 공간을 소리로 채우며 묘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얼핏 들으면 단란한 대화라고도 할 수 있을 잔잔한 소음. 말소리와 그 사이사이 공백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기분 좋은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가르며, 온화한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투창이 쉭― 소리를 내며 거세게 날아든다. 진지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의 목을 뚫고 그대로 벽에 처박힌 창이 벽에 꽂힌 반동으로 옅은 진동음을 흩뿌린다. 그 고요함과 어울리지 않게도, 남자의 목에서는 피가 역류하고 숨이 꺼져가는 불쾌한 소음이 흘러나와 좁은 골목에 울려 퍼진다.

     그럼에도 이 공간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크게 해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 덕분인지. 힐다는 짐짓 아쉬운 체를 하며 골목 사이로 나타난 디엔을 노려보았다.

     “아~ 오랜만에 재미있는 상대를 만났는데.”

     당연하지만, 그는 그런 반응에 속지 않는다. 힐다가 속으로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

     “적과는 대화하지 않는 게 원칙이야.”

     벽에 꽂힌 창을 뽑아 든 디엔이 사람 좋게 웃으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창끝을 힐다의 목에 들이댔다. 힐다가 전혀 반응하지 않고서 마주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기 직전 인상을 아주 잠깐 찌푸린 것은 그녀를 오래 보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짧은 찰나였다.

     “뭐야?”
     “배신자에게는 죽음을... 그게 조직의 제1원칙이지.”
     “그런 거 안 했는데? 아직은.”
     “알아, 그냥 경고야. 조심하라고. 적과 대화하는 건 배신자로 보이기 쉽잖아?”
     “가만 보면 날 죽이고 싶어서 안달난 것 같아?”
     “설마.”

     힐다가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고 빠르게 돌진했다. 디엔 역시 피하지 않았다. 귓속말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간 힐다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몇 명이나 있어?”
     “최소 넷.”
     “망했네~ 누가 제일 위험해?”
     “11시 방향에 저격수. 나머지는 괜찮아.”
     “좋아, 그럼― 가자.”

     11시 방향을 겨냥한 힐다의 종이가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갈랐다. 깔끔하게 세로로 양단된 저격총이 검은 잉크가 튄 종이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힐다가 웃어 보였다.

     “히어로들답게 치사한 수를 쓰네~ 이런 무기는 너무 험악하지 않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목 여기저기서 히어로들이 튀어나왔다. 차근차근 좁혀 오는 포위망 중앙에서, 디엔과 힐다는 등을 맞대고 설 수밖에 없었다(둘 다 서로에게 등을 맡기는 것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넷이라며~?”
     “최소 넷이랬지. 온다― 3시.”

     디엔이 마지막 음절을 채 끝맺기도 전에 종이가 3시 방향으로 날아갔다. 검은 잉크만 튀어 있던 종이에 붉은색이 덧입혀지자, 쓰러진 히어로의 동료들이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이게 히어로들의 무서운 점이지. 동료가 하나둘 쓰러질수록 더 강해진다는 것이. 그러나 어쩌겠는가? 빌런은 외롭게 한 명 한 명씩 쓰러뜨려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그들처럼 신뢰 관계로 맺어진 동료는 없을지언정, 각자의 이익을 위해 잠시 손을 잡은 계약 관계는 있었다.

     그리고 싸우는 데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9시 방향에 둘!”
     “계속 불러!”
     “7시― 다음 1시― 다시 9시―”

     9시 방향으로는 힐다의 종이가, 7시 방향으로는 디엔의 창이 날아갔다. 1시 방향에서 달려든 히어로는 힐다가 침착하게 휘두른 단도에 목이 그어졌고, 9시 방향에 있던 이는 디엔의 새에게 눈을 쪼여서 괴로워하는 사이 심장에 칼이 꽂혔다.

     “살아 있어?”
     “응~ 어쩌다 보니.”
     “솔직히, 오늘 둘 중 하나는 죽을 줄 알았는데.”
     “같이 돌아가게 돼서 아쉽게 됐네?”

     마침내 골목에는 다시 적막함이 찾아들었다. 골목에 펼쳐진 풍경은 붉은색의 향연이었지만, 골목을 휘도는 바람 소리는 그저 평온했다. 디엔이 본부에 연락하는 사이, 힐다는 얼굴에 튄 피를 꼼꼼하게 닦았다. 디엔은 검은색 외투 안에 하필 흰 셔츠를 입고 있던 탓에 한층 더 살풍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힐다가 품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내 던졌다. 디엔이 통화하는 도중에 날아온 손수건을 잘도 잡아챘다.

     아무리 동료의식 옅은 빌런들이라도 나름의 친절을 베풀 수 있다는 사실을, 히어로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들 사이의 이런 소소한 친절을 목격하고도 살아 돌아간 이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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