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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프물
    1차 2024. 2. 17. 17:22


     「이게 대체 몇 번째 루프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할 만한 점은, 이제는 루프가 실행되는 조건을 안다는 점이다. 비록 이 사실을 알아내기까지 아주 긴 시간이 흘렀지만, 조건을 안다면 이제는 막을 수 있다.」

     「루프 조건은 힐다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여러 번의 관찰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힐다가 담배를 피우고 나서 최소 반나절, 길게는 사흘이 지나면 이 세계는 2월 17일로 돌아간다. 기간이 좀 들쭉날쭉하긴 하지만 그 모든 루프 속에서 공통점은 힐다의 흡연뿐이었다.」

     「되돌아간 세상에서는 모두가 루프 이전의 기억을 잃는다. 나조차도 2월 17일 아침에 눈을 뜨면 어렴풋이 또 되돌아왔다는 사실만 기억날 뿐, 그전까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아무튼, 핵심은 루프를 인지하고 있는 게 나뿐이라는 것이다. 이 끊임없는 시간의 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1. 잔소리하기

     “너 담배 좀 끊으면 안 돼?”
     “어머~ 얘 좀 봐? 담배는 기호식품이라고~”
     “그... 뭐냐, 그렇지만 몸에도 안 좋고, 히어로는 여기저기 뛰어다닐 일도 많은데 그런 거 계속 피우면 체력도 떨어질 테고, 히어로가 히어로 활동에 방해될 만한 일을 계속하는 건 무엇보다 원칙 위반―”
     “그런 원칙은 들어본 적 없는데~ 그리고 매일 피우는 것도 아니잖아?”
     “아― 아무튼 끊으면 좋잖아? 한번 생각해 봐.”

     결과: 다음 날 오후 바로 루프함. 잔소리가 스트레스 요소였던 것으로 보임.



    2. 아예 못 피우게 막기

     힐다는 담배를 잘 사지 않는다. 가끔씩만 피우니까. 그러니 매번 동료들에게 한 개비씩 빌려서 피우는 게 일상인데... 즉, 힐다의 동료들에게 담배를 빌려주지 말라고 부탁한다면 담배를 입수할 경로를 일시적으로나마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 며칠 뒤 힐다가 술 사준다고 동료를 꼬셔서 담배를 얻어냈고, 루프함. 힐다의 사교성을 간과했음.



    3. 스트레스받을 일 없게 하기

     힐다는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을 때만 담배를 피운다. 즉, 힐다가 받는 스트레스를 줄여준다면 금연의 길로 이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뭐 스트레스받는 일 있어?”
     “네가 갑자기 이상하게 구는 게 스트레스일 것 같은데~”
     “아니, 진지하게. 혹시 일이 바빠? 내가 대신 좀 해줄 수 있어.”
     “진지하게 네 언행이 스트레스가 되기 시작했어. 넌 누구지? 이번엔 디엔을 꽤 잘 따라 했군.”
     “...친구 걱정해서 스트레스 좀 덜 받게 해주겠다는데 감동하진 못할망정.”
     “하, 예전에도 이런 빌런은 있었지만... 이번엔 그때보다 더 발전했는걸. 하지만 날 속이려면 한참 멀었어... 그놈이 아무리 일 중독자라지만, 남의 일을 대신 해주는 친절을 베풀 것 같아?”

     결과: 변신한 빌런이 아님을 인증받을 때까지 후드려 맞고 며칠 뒤 루프함.



    4. 금연에 강한 동기 부여해주기

     “야, 네가 만약에 담배 끊으면... 앞으로 1년 동안 꼬박꼬박 누나라고 부르고 원할 때마다 밥 사다 바칠게.”
     “돌았니~? 네가 그런 수지 안 맞는 거래를 제안할 리가 없는데~ 너, 뭐 숨기는 거 있지?”
     “숨기는 거? 있지. 사실 난 담배 냄새를 진저리나게 싫어해. 맡을 때마다 수명이 5년씩 팍팍 깎이는 느낌이라고. 그러니까 최소한의 동료애가 있다면 좀 끊어줄 수 없어?”
     “이상한데~ 나보다 훨씬 많이 피우는 동료들도 많은데, 왜 굳이 자주 피우지도 않는 나를 찾아와서 이러실까? 너무 수상한걸~”
     “아, 수상한지 아닌지는 일단 겪어봐야 알지.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음~ 좋아! 그 도전, 이 누님이 받아주지.”

     결과: 일주일 뒤 루프함. 내가 없는 데서 몰래 피운 것 같음.



    5. 인간의 존엄성 포기하기

     “힐다, 할 말이 있는데...”
     “뭔데?”
     “사실, 나 처음 볼 때부터 널 좋아했어. 나랑, 그... 사귀어 줄래?”
     “...어쩌지? 네가... 혹시 죽을병에, 아니... 고작 죽을병 걸렸다고 이런 미친 말을 할 리가...”
     “진심이야. 그래서... 만약 나랑 사, 사귄다면. 너도 날 생각해서 담배를 끊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나, 속이 안 좋아.”
     “...시발, 나도. 너 가서 빨리 담배 한 대만 피워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그래. 지금 격하게 담배가 땡기던 참이었어...”

     결과: 무사히 루프한 뒤 2월 17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달려가서 토함.



     「아무래도 나는 평생 루프 속에 갇혀 살아야 하는 운명인 것 같다.」

     「힐다가 담배를 자주 피우는 사람이 아니니 꽤 오래 버틸 때도 있지만,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면 결국 루프를 끊어낼 수 없다는 점에서 큰 의미는 없다.」

     「이제 슬슬 여름이 그리워지려고 한다. 나 혼자만 이 루프 속에서 며칠이 흐른 걸까. 1년? 2년? 시간 감각이 없어지는 기분이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나도 기억을 잃고 루프 속에 갇혀 버릴지도...」

     「조금만 쉬고, 다시 생각해 보자... 어떻게 해야 할까?」

     

    *

     


     「이게 대체 몇 번째 루프인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돌아오는 2월 17일이 지겹긴 하지만, 그래도 이 루프는 멈춰서는 안 된다. 내가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는.」

     「루프의 핵심에는 디엔이 있다. 디엔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면, 이 세계는 즉시 2월 17일로 돌아간다.」

     「디엔의 능력 특성상 언제라도 죽을 수 있으니 루프는 늘 갑작스럽다. 그나마 머리카락과 눈 색의 변화를 통해 시기를 대략 예측할 수 있긴 하다. 디엔은 눈동자가 완전히 희게 변한 뒤로 최소 반나절, 길게는 사흘까지 버틸 수 있다.」

     「되돌아간 세상에서는 모두가 루프 이전의 기억을 잃는다. 디엔은 루프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때마다 죽는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다행인 일이다. 자신이 몇 번이고 죽음을 겪고 있다는 걸 알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디엔은 그렇게 바보가 아니니, 별 이유도 없이 세계가 계속 돌아간다면 의심하겠지. 그러니 디엔의 시선을 돌릴 가짜 루프 조건을 만들자.」

     「디엔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루프 조건으로 보일 만한 특정한 행동을 하자. 디엔이 보고 나서 그 행동이 루프의 조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담배는 어떨까? 루프가 가까워질 때마다 디엔이 보는 데서 담배를 피운다면,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시선을 무사히 돌렸다면, 이제 생각해야겠지... 어떻게 하면 디엔을 살릴 수 있을까?」

     「확실한 건, 그 일 중독자가 능력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고 싶다면 이제라도 히어로 일을 그만두고 남은 생을 얌전히 보내는 수밖에 없다.」

     「조금만 쉬고, 다시 생각해 보자... 어떻게 해야 할까?」

     

    *

     


     “너 담배 좀 그만 피우면 안 돼?”
     “이미 반 피웠지롱~”
     “...하, 이번에도 실패네. 넌 모르지? 네가 담배 피울 때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글쎄~? 내 폐에 니코틴이 조금 더 쌓였겠지.”
     “그래... 됐다. 어차피 다 잊어버릴 거 설명해 봤자 뭐하냐.”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는걸~”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든 디엔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황한 디엔이 창을 떨어뜨리며 피를 소매로 닦았다. 힐다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던져주었다.

     “땡큐.”
     “...담배 피우는 나보다 안 피우는 네가 더 빨리 죽겠는걸.”
     “죽기는 무슨. 야, 손수건 빨아서 내일 돌려줄게.”
     “됐어. 그냥 가져. 나 이거 마저 피우고 들어갈게. 먼저 가.”
     “그래...? 뭐, 알겠어... 너무 늦지 말고.”
     “원칙 위반이니까?”
     “그렇지.”

     멀어져가는 디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힐다는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냈다. 망할 루프 때문에 요즘 흡연량이 늘었다. 디엔의 눈을 속이기 위해 피우는 것 외에도,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루프를 계속 겪다 보면 자연히 담배를 피우고 싶어지게 된다. 오늘은 그냥 들어가지 말까? 상태를 보니까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데. 굳이 들어가서 그 꼴을 또 보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수십, 수백 번을 더 봤으니까.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필터 끝에 거의 대롱대롱 매달린 담뱃재를 툭툭 털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고 일어나면 또 2월 17일이겠지. 그녀는 이번에도 실패했으니.

     아무래도 평생 그 녀석의 죽음 속에 갇혀 살아야 하는 운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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