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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ㅌㅇㅇ카테고리 없음 2024. 11. 5. 17:21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상황, 상상해 본 적 있어? 사람들은 겁이 많아. 이미 존재하는 멸망 스토리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지. 운석이 떨어졌든, 바이러스가 퍼졌든, 기후가 변화했든... 어쩌면 변덕이 지랄맞은 신이 세상에 사악한 손길을 뻗쳤을 수도! 아무튼, 세상이 싹 전멸하고 황량한 폐허에 우리 둘만 남은 거야. 상상해 본 적 있어? 그런 세상에서도 지는 해를 볼 수 있을까. 물론, 그건 어떤 멸망 루트를 밟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지만, 말이야. 그래도 보러 가야지. 달링이 가장 좋아하는 거잖아, 그건. 내가 석양을 보러 가자고 하면, 달링은 당장 오늘 먹을 것 구하기도 힘든 시기에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 하고 타박하지도 않고 느긋하게 따라나서겠지. 다 낡아빠져서 털털거리는 달링의 캠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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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클시클 2024. 10. 11. 21:17
며칠 전부터 전등이 깜빡이는 듯하더니 기어코 불이 나가버렸다.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다. 그는 전등을 갈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그저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것뿐인. 며칠간 전등불의 깜빡임을 무시해 온 그 꾸준함을 가져다 앞으로의 어둑함을 무시하는 데 써먹으면 그만이다. 흔해 빠진 우울감, 흔해 빠진 무기력, 흔해 빠진 사랑이 그가 앓는 질병의 이름이던가. 그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간 일이 없었다. 그에게 인간관계란 먼저 다가온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게 사기꾼이든, 사이비든, 좀도둑이든, 혹은 아주 아주 드물게도 진짜 사랑꾼이든, 간에,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목적을 이루면 떠난다는 것.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남의 목적을 이루어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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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힐카지노1차 2024. 10. 7. 16:42
가을을 호흡기로 느끼기란 어렵지 않다. 희고 깨끗한 구름 몇 점 정도가 평화롭게 떠 있는 날, 시간은 오전 7~8시경이 좋겠다. 실외로 갓 나온 사람들은 그날따라 어쩐지 숨을 크게 들이켜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8월이 다 가기 전까지는 한 번도 들지 않았던 생각에,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 따른다. 그러면 코로 훅 들어오는 상쾌함, 그것을 사람들은 흔히 가을 냄새라고 부른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말로 정의할 수도 없으면서. 아무튼, 그런 날씨가 아니었더라면, 디엔이 답답한 정장 차림을 30분 이상 참아주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힐다는 사람을 너그럽게 만드는 이 마법 같은 날씨에 감사해야 할 것이었다. “...왜?” 그래도 날씨가 상쇄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사람을 불편한 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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앝오카테고리 없음 2024. 9. 11. 16:30
#1 동굴 안은 습하고 축축했지만, 꽤 아늑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고자 급히 찾은 은신처치고는 상당히 훌륭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제법 지쳐 있었던 듯,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서 제 다리를 통통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행자 애인을 두고 모시려니 다리 성할 날이 없네. 안 그래, 달링?” 장난스러운 투의 칭얼거림은 덤이고. “그게 다 근육이 부족해서 그래요.” 오에가 아무렇지 않게 만물근육설을 또 한 번 내밀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에의 손은 이미 아스타리온의 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었다. 하도 돌아다녀서인지 단단히 알이 배긴 종아리를 풀어 주고, 허벅지로 올라와서 다시 힘주어 주물렀다. 그동안 둘은 어쩐지 말이 없었다. 들려오는 건 바깥의 빗소리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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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오에카테고리 없음 2024. 8. 5. 15:35
오에가 놀이공원에 가자고 한 건 순전히 충동에 따른 결과였다. “놀이공원이라고, 달링.” 아스타리온이 그 단어를 발음하는 어조는 그가 그 장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네, 지금 그리로 가는 중이에요.” 오에가 핸들을 무자비하게 꺾으며 평이한 어조로 답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차는 오에가 2년 전, 가출하면서 집 대신으로 장만한 캠핑카였다. 오에는 오늘 목적지가 놀이공원이라고 통보한 뒤, 아스타리온을 차 안에 즐비한 잡동사니들 사이에 대충 끼워 넣고 막 출발한 참이었다. “꿈과 희망과 행복이 가득한 ☆☆랜드 말이지, 달링.” 아스타리온의 말투는 여전히, 지상 어딘가에 그런 장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네, 맞아요. 꿈과 희망과 행복이 가득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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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오에카테고리 없음 2024. 7. 12. 16:21
아스타리온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일어났다. 그리고 내쉬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로 가득 들어오며 정신을 환기했다. 더없이 상쾌한 정신으로, 아스타리온은 옆에서 아직 자고 있는 오에를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 자기야. 정말 농담 같지도 않은 꿈이네. 내가 숨을 쉬다니.” 그래도 나쁘지 않은 꿈이야, 그치. 일어나면 달링한테 말해줄 이야깃거리가 하나 생겼네! 아스타리온은 만족스럽게 다시 오에의 옆자리에 누웠다. 오에는 숨소리도 없이 자고 있었다. 숨소리도 없이. 아스타리온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아스타리온이 부드럽게, 오에를 흔들어 깨웠다. 늘 오에를 깨울 때 쓰던 그 다정한 말투와 억양으로, 가능한 평소대로 행동하려고 애쓰면서. 오에가 일어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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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하락카테고리 없음 2024. 6. 19. 18:18
1 삶을 언어로 규정하고자 할 때, 오에는 시계의 이미지를 빌려 왔다. 모두가 출발선에 서서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유년기는 2시쯤 될 것이다. 청년기는 4시쯤, 6시부터는 중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9시경을 지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고, 바늘이 한 바퀴를 돌아 12시에 도달함과 함께 존재는 소멸한다. 윤회의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나와는 또 다른 존재가 12시에서 새로 출발한다. 모두가 똑같이 12시에서 출발해 12시에서 죽음을 맞는다. 다만 종족별로 바늘의 종류는 조금씩 다를 것이다. 인간과 같은 단명종을 분침에 비유할 수 있다면, 드로우인 자신은 시침이었다. 인간 열두 명이 차례로 회전하면서 존재하고 소멸하고 존재하고 소멸하고, 거침없이 돌 동안 오에는 느긋하게 돌았다. 그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