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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클시클 2024. 6. 5. 20:48
시온은 그 자신이 상식적인 인간이라는 데서 오는 자부심을 어느 정도 가지고 살아왔다. 그때까지는. 그때라고 함은, 그가 클로에는 감히 상상도 못 할 법한 뒷세계의 루트를 통해 인육을 처음 접했을 때를 말한다. 그가 이러고 있음을 클로에가 안다면 그녀는 화를 낼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 나중에 스스로 고해바칠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클로에는 대체 무슨 젠장맞을 세계의 법칙이 당신더러 그런 짓을 하게 밀어붙였느냐고 따지겠지. 그리고 거기에 대고 그냥 당신의 입맛이 궁금해서요, 라고 대답하는 건 상당히 쪽팔린 일이 될 것이다. “친구, 그럼 맛본 뒤에 연락 달라고. 생각보다 입맛에 잘 맞을지도 모르니까.” 시온은 귀찮음이 절절히 묻어나는 고개 끄덕임 한 번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불법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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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오에카테고리 없음 2024. 6. 3. 14:35
그들은 종종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자기는 죽는다면 어디에서 죽고 싶어? 아스타리온이 물었다. 글쎄요, 일단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라면 좋겠네요. 죽음이 가까워진 걸 느끼면, 마지막 힘을 짜내 당신의 손을 잡고 그곳에 올라서, 숨을 고르며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달을 바라보고― 그대로 쓰러져 죽는다면 좋겠어요. 오에가 답했다. “오, 낭만적인걸, 달링... 햇빛이 보고 싶지는 않아? 달빛도 좋지만, 말이야.” “흠, 글쎄요. 햇빛도 좋지만,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손을 잡고 있다면 좋겠는걸요.” “자기야, 나라고 해서 다를 거라 생각하지 마. 나도 마지막 순간에는 자기의 손을 잡은 채로 죽고 싶어. 그러니 자기에게 죽음의 순간이 오면, 우리 함께 손을 잡고 일출을 보러 가자. 응?” 오에는 가만히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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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하락카테고리 없음 2024. 5. 28. 21:20
1 아스타리온은 문을 열었다. 달큰한 냄새가 집안을 떠돌고 있었다. 그 외 특이 사항은 없다. 고급스러운 양탄자, 오래된 느낌의 고풍스러운 가구들, 압도적인 크기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벽시계, 그리고 굳게 닫힌 문. 아스타리온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말라 일렀지만 아마 몇 번쯤은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저 문 안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존재의 목을 따버리기 위해서. 물론 모두 실패했으며 그들은 제 발로 걸어 돌아가지 못했다. 벽시계는 정오를 가리켰다. 사랑하는 달링, 밥 먹을 시간이네... 그는 문을 열었다. 2 갓 짜낸 피가 가장 신선하다는 사실은 뱀파이어가 아닌 이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법한 상식이다. 그런 이유로 아스타리온은 그 방 안에서 사냥감을 직접 손질했다.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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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툴로에시클 2024. 5. 12. 14:50
그는 인간을 싫어한다. 별로 비밀스러운 사실은 아니다. 이미 그의 얄팍한 인간관계 내에서는 그가 끼니보다 더 잦은 횟수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런 생각이라 하면 또 종류가 제법 많은데 대표적인 것만 예로 들자면― 인간 다 죽었으면 좋겠다든지. 아니 인간이 이제야 다 죽어서 뒤늦게 허겁지겁 없어지실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라든지, 멸망? 지구 멸망? 하지만 지구가 무슨 죄가 있다고 멸망까지야. 깔끔하게 호모사피엔스 종만 이 넓은 우주에서 깔끔하게 사라졌으면 좋겠다. 저 멀리 은하 너머 하여튼 어딘가에 외계인인지 뭔지 뭐 다른 생물체가 있든 말든, 지구에 남은 생물체가 뭐가 됐든. 싫어하는 이유를 굳이 또 짚고 넘어가자면 시간 낭비이겠지마는. 그는 따지자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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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시클 2024. 5. 1. 01:17
오늘은 클로에가 689일 만에 집에 돌아가는 날이다. 원래 이렇게나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처음 계획은 여섯 달 정도. 여섯 달 정도만 떨어져 있어도, 시온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클로에는 이미 숱한 시도 끝에 자신이 계속 곁에 있는 한은 시온의 마음이 강해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클로에를 향해 보이는 심한 의존증과 집착. 그런 그의 관심이 클로에로서는 싫지 않았지만, 이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클로에가 곁에 없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인연은 영원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큰맘 먹고 집을 떠나 여섯 달 동안 세상을 혼자 여행하려 했는데― 세상일이란 게 다 그렇지 않던가. 이런 일이 생기고, 저런 일이 생기고, 하여튼 어떠어떠한 복잡한 사정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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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클 파이널시클 2024. 3. 17. 12:58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본 것은 조그만 구체였습니다. 저― 멀리 하늘에 떠오른 구체는 세상으로 차가운 빛을 흩뿌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름다움에 취해 무작정 그리 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무심코, 작고 꿈틀거리는 생명을 밟아 짓이겨버린 모양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그 작은 생명의 눈으로 그 구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눈으로 보는 그 구체는 너무 아름다워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더 큰 생명을 탐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더 큰 생명을 잡아먹을 때마다 그 생명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다가, 마침내는 두 발로 걷는 동물을 잡아먹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지금껏 잡아먹은 모든 생명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미, 쥐, 토끼, 여우, 호랑이... 인간. 저 아름다운 구체의 이름은 달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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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포에유1차 2024. 3. 12. 16:32
연성에 등장하는 용어 짤막 사전오러: 해포세계 히어로녹턴앨리: 해포세계 뒷골목패트로누스: 디멘터라고 그거 물리치는 고등 마법. 각자 다른 동물 형태를 띠며 간단히 소통도 가능 - “어떻게 입으라고?” “내가~ 죽음을 먹는 자가 되었다~ 하는 마음으로.” 디엔은 눈을 굴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온통 새까만 색으로 차려입은 힐다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모자에, 검은색 실크 드레스에, 검은색 망토와 검은색 부츠까지. 심지어 간단한 마법으로 머리카락까지 검은색으로 바꾼 힐다의 모습은 병원 같은 곳에라도 들어가면 사람 여럿 놀라게 할 것처럼 보였다. 디엔이 자기가 가진 것 중 최대한 어두운 색 옷을 골라잡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니까 왜?” “가보면 알아~” 힐다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면서 건성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