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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미션 2023. 1. 4. 23:51


     시온은 자기가 생각해도 등신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오늘 사무소 문을 열까 말까 하는 문제였다. 

     사는 데 하나 있는 수입원을 제대로 굴릴 생각이 안 드는 걸 보니 부자 체질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느지막하게 문을 열었고, 얼마 안 가 오늘의 첫 손님들이 들어왔다. 젊은 부부 혹은 연인, 뭐 그런 관계인 사람들 같았으나 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그저 사람이 둘이니 느껴지는 불쾌감도 두 배일 뿐이었다. 

     내와야 하는 차도 두 배일 테고. 그는 기계적으로 손님 대접용 차를 우려냈다. 우리는 동안에는 찻잔을 뚫어져라 노려봄으로써 먹고 서둘러 꺼지라는 마음을 듬뿍 담았다.

     “...그래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구구절절한 사연 끝에 여자 쪽이 말했다. 보통 의뢰하러 온 사람들은 ‘도와달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인간은 목숨이 절박한 게 아닌 이상 쉽게 공손해지지도 않고. 그리고 누군가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란 높은 확률로 위험한 단체와 관련되어 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 지난 의뢰 파일철을 꺼내와서 뒤적거렸다.

     지난 의뢰에 대해 기록한 문서들은 그와 클로에만 아는 암호문으로 되어 있었다. 몇 년 전에 클로에가 직접 고안한 창작 암호였다. 그는 며칠간 머리를 싸매고 외운 끝에 겨우 암호에 익숙해질 수 있었지만, 그때쯤 클로에는 이미 다른 과정 없이 곧바로 암호문을 속기할 수 있었다. 질투 날만큼 똑똑한 사람 같으니라고. 비슷한 과거 의뢰 내용을 찾아 눈으로 빠르게 훑은 그가 파일을 소리 나게 탁 덮으며 말했다. 역시 건드리면 안 되는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일이면 협회 소속 사무소 알아보셔야 할 겁니다. 일개 개인 해결사가 뭘 어떻게 할 수준이 아니에요.”

     물론 대부분의 협회는 뒷골목의 큰 조직에서 무슨 일을 벌이든 못 본 척하는 게 관례처럼 되어 있으니 어차피 그쪽으로 가도 별 소득은 없을 것이다. 그들 중 남자 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큰 사무소에 의뢰할 돈은 없어서요...”

     시온은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을 굳이 육성으로 확인시켜 주는 사람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럼 이 시간부터 별 볼 일 없는 개인 사무소에 사이좋게 손잡고 기어들어 오신 분들이 뭐 얼마나 대단한 부자이시려고... 그리고 돈 때문에 안 해주는 게 아니었다. 그는 분명하게 ‘못 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불편한 심정으로 꺼낸 거절의 말을 상대가 못 알아들어서 반복해야 하는 상황도 짜증스럽기 그지없었다. 비록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면 이들은 죽겠지만,

     “죄송하지만 제 능력 선에서는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 그게 오늘은 저들 차례일 뿐이다.





     거리에 쌓인 눈은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도로 위에 가볍게 깔린 얼음덩이들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받아 검게 빛난다. 낮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이 시간에는 길 위에 그 혼자뿐인 거리. 퇴근길로 이 골목을 고른 것은 제법 좋은 선택이었다. 골목을 쓸고 다니는 바람 소리가, 사람이 중얼거리는 말소리를 덮어 가려줄 만큼의 작은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 딱 그 정도의 소음이 필요했다. 적막함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생각을 방해할 만큼 시끄럽지는 않은. 묵혀둔 대화를 꺼내놓기에 좋은 시간이다. 그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 안에서 물건들이 서로 부딪혀 쨍강거리는 소리가 난다. 진부한 화두였지만, 그는 그 소리를 핑계 삼아 입을 연다.

     “당신이랑 술이나 한잔 마실까 해서요.”

     비닐봉지 안의 술병이 또 한 번 쨍강, 소리를 낸다. 완벽한 맨정신이지만 어쩐지 검게 빛나는 도로 위로 내딛는 발걸음이 조금 비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이, 그렇게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여튼 잔소리는...”

     사실 그에 눈에 비치는 검은 도로는 검은색이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몇 달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제 눈과 귀를 통해 보이고 들리는 것이 무조건 진짜라는 확신을 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지만... 오늘만 봐줘요. 오늘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이 있었는데. 가는 길에 들어볼래요?”

     그는 혼자 떠들기 시작한다. 듣는 이 없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와 섞이면서 적당한 중얼거림이 되어 사라진다. 아직도 세상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우습긴 했지만, 그는 하루 중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10분 남짓 동안 오늘 하루를 담은 이야기도 끝에 다다른다. 그는 안정치 못한 걸음걸이로 집에 들어와 불을 켠다. 지금부터 준비해서 먹는 걸 저녁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늦은 밤이다.





     사람은 참 변하지 않는 생물이다. 시온의 경우 특히나 변하지 않는 걸 꼽으라면 주량이었다. 그는 항상, 술을 참 못 마셨다. 나쁘지 않았다. 술을 못 마신다는 건 조금 더 쉽게 정신을 흐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흐려진 정신에서는 낮에도 불시에 나타나서 집중을 방해하던 그녀의 모습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바닥을 울린다. 언젠가의 파티장에서 봤던 것 같은 검은색 드레스 차림으로, 치맛자락을 우아하게 그러모아 잡고 기품 있는 발걸음으로 또각또각- 일정한 리듬감을 가진 발걸음으로 그의 주변을 왔다 갔다 맴돈다. 그의 기억 속 가장 아름다웠던 클로에의 모습-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은 정장이 더 잘 어울려요.”

     아니, 드레스가 안 어울린단 뜻은 아니고, 드레스도 예쁜데, 정장이 조금 더 멋있으니까...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말을 주워 담으려 횡설수설한다. 말할 때 멋이 없어지는 건 술처럼 정신을 흐리게 하는 모든 약물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이리라. 클로에는 여전히 구둣발로 또각거리며 방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또각, 그는 들고 있는 잔으로 시선을 내리깐다, 또각, 맑은 액체 위로는 그의 얼굴만이 반사되어 보인다, 또각, 희미한 초록빛이 액체 표면과 유리잔 사이에서 이리저리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또각, 하는 소리가 점점 느려지더니, 마지막으로 또각, 하고 그의 앞에서 뚝 멎는다.

     “나도 알아요... 당신은 아직도 내가 앤 줄 알아.”

     클로에가 마침내 자세를 굽혀 그의 앞에 마주 보고 앉는다. 그는 손에 든 잔을 쳐다보는 데 질려서 시선을 막 자기 손가락 쪽으로 옮긴 참이다. 감각이 먹먹한 와중에도 네 번째 손가락에서 반지―금색에 녹색 보석, 심플하지만 가격이 꽤 나갈 것처럼 생긴―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또, 잔소리. 도시에서 제정신 챙기고 사는 놈이 얼마나 있다고 그래요? 이만하면 괜찮지.”

     시온이 고개를 들어 클로에를 마주 본다. 클로에가 웃으면서(그의 환상은 고증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듯하다) 무언가를 이어 말한다.

     “...난 당신이 그런 말 할 때가 제일 얄밉더라...”

     무슨 말이었는지 내일도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마지막으로, 그의 정신은 무의식의 바다로 깊이 잠수한다.





     세 달 전, 클로에가 죽었다.
    그러니 그가 매일 밤 씹어 삼킬 것은 과거의 기억뿐이었다. 깊게 잠들수록 의식은 최근 기억부터 출발해서 더 오랜 과거로 빠져들었다. 
    일이 있기 직전의 클로에는 웃고 있었다. 평소에 자주 웃는 편이 아니었는데도, 그 순간에는 그랬다.
    정비한 지 얼마 안 된 사무소 안에서 그가 철저히 클로에의 수준에 맞춰 만들어진 암호를 끙끙대며 외우고 있을 때, 뒤로 살짝 다가온 클로에는 아무 말 없이 틀린 부분을 짚어주었다.
    자, 허리에 손을 얹고. 상체를 받쳐주는 거예요... 해결사들이 모인 파티장에서 그의 손을 붙잡고 다소 거칠게 이끌던 클로에가 말했다.
    로보토미사가 망한 이후로 한동안 몸살을 앓던 그는 오락가락하는 상태로 클로에의 옷소매를 붙잡고 겨우 말을 꺼냈었다. 당신이 괜찮다면... 난 앞으로도 당신이랑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 (이후 한 달 넘게 놀림당했었고.)
    어느 해의 크리스마스, 웃음 에고를 입은 창백한 안색의 클로에가 딱 봐도 시온의 것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반지를 내밀었다. 비싸지만 뭔가 어설픈 게, 꼭 누가 생각나는데요. 그의 조잡한 반지를 받아 든 그녀도 질세라 덧붙였다. 저도 생각나네요. 남에게 호의를 보이는 척하지만 결국 자기 마음대로인 누군가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아직 그를 상대로 힘 조절하는 것도 어려워했을 적의 클로에가 그를 끌어안기 전에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정말로요. 두 번은 안 말할 테니 평생 기억하세요... 그리고 처음으로 보여준 미소.
    그리고 시간은 흘러 그는 다시 방 안에 혼자, 완전히 미친 사람의 꼴을 한 채 떨리는 손으로 정신없이 편지를 쓰고 있다. 누구든 이 편지를 받게 될 사람에게, 짧고 비참하게 끝날 줄 알았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사람에게. ‘누군가의 유서로 시작하는 하루는 별로 유쾌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보여줄 장면이 없다는 듯 영상이 툭 끊기면서,

     그는 피가 낭자한 부엌에서 눈을 뜬다.





     햇빛이 비쳐드는 아침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무심코 손으로 붙잡았다가 손끝부터 정수리까지 달려 올라오는 통증에 잠이 확 달아났다. 제대로 찢어진 손바닥에서 피가 진득하게 흘러나왔다. 간신히 흐르지는 않는 상태로 반쯤 굳은 걸 일어나면서 괜히 건드려놓은 모양이었다. 주변에는 깨진 유리병 조각들이 난잡하게 널려있고, 살풍경하게도 칼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유리 조각을 대충 쓸어 치우고 손에는 적당히 붕대를 감으면서, 그는 자기가 생각해도 등신 같은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늘 사무소 문을 열까 말까 하는 문제로, 사는 데 하나 있는 수입원인데도 제대로 굴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건 클로에의 꿈을 담아 시작한 일이었다. 이제는 주인 잃은 무의미한 일을 그저 이어나가고 있을 뿐이었기에.

     누군가가 생전에 하던 일을 잇는 행위는 결국 살아남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산 사람들은 그거라도 하면서 떠난 이를 추억하며 계속 살아가라는 의미로. 떠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지. 그리고 그는 클로에가 아닌 그 자신을 위해서라면 빌어먹을 어떤 행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느지막하게나마 사무소 문을 열 것이다. 그것 말고는 할 일이 없으니, 그저 그뿐이다. 어제의 그 사람들은 아마도 지난밤을 넘기지 못하고 살해당했을 것이다. 슬픈 일은 아니었다. 그들의 차례였으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내 차례도 올까... 그는 그날이 가능한 한 소리 없이 빠르게 찾아오기를 바라며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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