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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미션 2023. 1. 19. 23:18

    *주의: 고어 묘사

     

     

     

     정적을 깨지 않을 만큼 고요하면서도 걸음마다 묵직함이 느껴지는 발소리가.

     “오.”

     그가 여기 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한 듯 짧고 건조한 감탄사. 하지만 늘리거나 과장하지 않은 그 한 음절에도 꽉꽉 눌러 담은 비꼼의 낌새가 스며들어 있다. 일정한 속도로 점점 다가오던 발소리는 그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약 다섯 걸음 떨어진 지점까지 와서 멎는다.

     클로에다. 시온은 어둠 속에서 흐릿한 실루엣만 보고도 그녀를 쉽게 알아본다. 그리고 그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였는지.

     “당신은  여기에 있죠?”

     왜, 라는 음절에 힘을 준 말투가 방금의 감탄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히 묻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은 질문이지만, 그 속뜻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당장 꺼지라는 뜻일까? 아니면,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인 그를 이곳에 계속 세워두고 실컷 조롱하겠다는 뜻일까. 아무튼, 그는 말없이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알면서도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악몽은 현실과 닮았다. 그래도 오늘 꿈은 그의 목을 물어뜯지 않을 만큼 이성적인 클로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리 지독한 편은 아니었다.

     “멋진 무대네요.”

     무대? 시온이 급히 주위를 둘러본다. 어느 정도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한 시야를 통해 불 꺼진 무대처럼 보이는 공간이 드러난다. 가벼운 소재의 마룻바닥, 무대 뒤편과 양 사이드를 둘러싸고 있는 붉은색의 허름한 천막. 그 공간 한가운데에 클로에가 명백한 단독 주인공 같은 태도로 서 있다. 몇 초 뒤면 정확히 그 자리에 주인공 배역을 위한 스포트라이트가 내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태도.

     “우리뿐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클로에의 목소리를 따라 시온의 시선이 점점 낮아진다. 그러다 클로에의 장갑 낀 손이 위치한 높이까지 시선을 내리고서야 마침내 그 손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클로에의 머리와 눈이 마주친다. 머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완벽한 무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목보다 위치가 낮으니 시온과는 눈높이가 전혀 맞지 않았지만, 클로에의 시선은 굳이 그 높이를 맞추려 들지 않는다. 하긴 클로에가 누굴 올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힘들었지만, 마치 그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 시선을 위로 향하는 것조차도 낭비적인 행위라는 듯이. 

     대신 시온의 눈높이에서 잘 보이는 건 머리가 잘려나가고 없는 목의 단면이다. 예리한 칼로 단번에 잘라낸 것처럼 피 한 방울 없이 깔끔한. 그는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시선을 밑으로 내리깐다. 예전에도 뭔가 잘못한 게 있는 채로 클로에 앞에 설 때면 종종 그랬던 것처럼. 클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머리를 든 손을 앞으로 내민다.

     “‘머리’는 제 모든 이성적 판단을 담당하는 부위죠.”
     “......”
     “설명이 조금 필요하겠네요. 당신은 이 무게를 모를 테니까.”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클로에가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으면서 천천히 말하기 시작한다. 낮고 느리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일정한 리듬을 가진 노랫가락처럼 무대를 채워간다.

     “찰나의 판단으로 살아 나갈 목숨과 죽어 없어질 목숨의 운명이 갈리는 공간에서...”
     “......”
     “저는 언제나 살아남는 쪽이 되기 위해 이성의 판단하에 움직이기 시작했고...”
     “......”
     “그렇게 저의 지지를 받은 잘난 이성이 말했답니다.”
     “......”
     “‘쓸모없는 것은 모두 버려라,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만 쥐고 나아가야 더 멀리 갈 수 있을 테니!’”

     마치 연극을 하는 듯이 과장된 손짓과 말투. 그와 상반되는 딱딱한 무표정을 한 머리가 클로에의 오른손으로 옮겨 간다.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지만, 더 끔찍한 광경을 외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클로에의 머리에 시선을 고정한다.

     “저는 언제나 그랬듯, 이성의 명령에 따라.”

     그러고는 클로에의 왼손이 망설임 없이 자기 가슴께 중앙으로 쑥 파고 들어간다. 무언가를 찾는 듯 안쪽을 뒤적거리던 손이 다시 거칠게 빠져나오면서, 손안에는 꼭 모형처럼 생긴 심장이 쥐여진다. 잘 씻어낸 것처럼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지만, 가슴팍에는 심장을 꺼낸 흔적으로 뻥 뚫린 구멍이 남아 있다. 충격으로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덮이면서, 그는 모든 게 꿈이라는 자각마저도 깨끗이 잊어버리고 만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버텨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동아줄이 손에서 막 빠져나가는 순간이다.

     “자... 버리고 갈 것은 무엇인지, 어느 쪽이 더 쓸모가 없는지 가려볼까요.”

     

     

    *

     

     

    사이, 어두운 무대 위로 강렬한 조명이 내리쬔다. 클로에는 조명을 제대로 받는 위치에 서 있고, 시온은 그 조명을 살짝 비껴간 곳에서 대사 없는 엑스트라처럼 그 광경을 보고 있다. 클로에의 오른손에는 자신의 머리가, 왼손에는 심장이 올려져 있다.

     

    클로에: 첫째로, 이 세상의 험악함이, 회사 안팎에서 우리의 몸과 정신을 위협하고 있잖아요. 몸이 죽으면 정신도 함께 죽겠지만, 정신의 죽음 또한 몸의 죽음과 단단한 끈으로 이어져 있죠. ‘이성을 잃은 상태’를 보통 매뉴얼에서는 패닉이라고 하듯이... 그러니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데 있어 이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에, 당신도 동의하나요?

     

     (머리를 들고 있는 손 쪽이 고장 난 인형처럼 덜컥, 하고 내려간다.)

     

    클로에: 두 번째로, 불규칙한 위험 요소가. 위험은 한 가지 모습으로만 찾아오지 않죠. 늘 새로운 방식으로 찾아오는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은 역시, 상황에 따라 이성이 내릴 수 있는 가장 빠른 판단을 따라가는 것이었고요. 지금껏 저를 살려준 이 고마운 이성 대신 죽이고 죽여서 가라앉히는 것만이 해답이었던 이것- (왼손에 들린 심장을 앞으로 살짝 내밀며)은 위험으로부터 저를 보호하기 위해 하는 일이 별로 없군요. 당신도 동의하나요?

    시온: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도 못한 채,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어쩐지 이유 모를 허전함을 느끼며 원래대로라면 목젖이 있어야 할 자리를 손으로 더듬어 본다. 목과 그 위에 있어야 할 머리 대신 피부 안쪽의 살덩이에 손가락이 잠시 들러붙었다가 찐득하게 떨어진다. 그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는다.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만 점점 커져간다.)

     

     (머리를 들고 있는 손 쪽이 다시 작게 덜컥, 소리를 내며 내려간다. 반대로 심장을 들고 있는 손 쪽은 목 근처까지 올라가 있다. 그 손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어져 있는 심장.)

     

    클로에: 마지막으로, 효율성 면에서 따져볼까요. 생존하는 데 하등 가치가 없는 이것을 남겨놔야 하는 이유는 오직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겠군요. 수지가 맞으려면 이것 대신 당신이라도 저에게 도움이 좀 되어야 할 텐데... 당신이 저를 사랑하는 이유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함이라면, 당신을 곁에 둠으로써 딱히 얻는 게 없는 저는, (사이) 당신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머리를 들고 있는 손 쪽이 내려간다. 시온이 목을 뻣뻣하게 움직인다. 목 위쪽이 없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마치 고개를 세차게 젓는 동작인 듯.)

     

    클로에: 이런 건 저한테 필요 없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필요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곁에 있어서 버릴 때를 놓친 것뿐이죠. 이제, (들고 있던 심장을 시온에게 내밀며) 가져가세요.

     

     (심장을 건넨 클로에가 머리를 목 위에 올려놓는다. 조금씩 돌리면서 꾹 누르니 이내 머리가 제자리를 찾는다. 가슴에 뚫려 있던 구멍은 웃음 에고가 꾸물거리며 움직여서 비어있던 공간을 채운다. 옷자락에 새겨진 웃는 얼굴 중 하나가 시온을 향해 찰나의 비웃음을 보낸다.)

     

    클로에: 우리는 언제나 선택해야 하죠. 한참 뒤에 있는 당신을 위해 돌아볼 시간은 없어요. 당신이 저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럼.

     

     (무대 오른쪽으로 클로에가 천천히 걸어 퇴장한다.)

     

    클로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는 쫓겨나듯 꿈에서 깨어난다. 꿈의 주체는 그 자신이지만, 그 무대는 오직 클로에를 위한 공간이었다는 듯이.

     

     

    *

     

     

     “일어났어요? 열이 좀 있으니까 이불 계속 덮고 있어요.”

     클로에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자기 목 근처를 더듬었다. 목 위에는 머리가 제대로 붙어 있고, 눈을 통해 클로에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얼굴에 달린 입으로 말을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벗어나 드디어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나한테 열 좀 나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 밤중에 일어나 있어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시온은 눈을 뜬 순간 클로에의 얼굴―목 위에 멀쩡히 붙어 있는―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에 거의 감사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클로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열만 있는 게 아니라 자면서 헛소리까지 하니까 깼죠.”
     “내가 뭐라고 했길래...”
     “저더러 자꾸 가지 말라고 하길래. 아무 데도 안 간다고 말해줬는데도 계속 반복하더군요. 악몽이라도 꾼 건가요?”
     “...자는 사람 헛소리에 대답해주는 당신도 딱히 정상은 아니네요.”
     “환자의 헛소리라 생각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제 이름까지 불러대니 무시할 수가 있어야죠.”

     이건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손해만 커져가는 대화였다. 그는 그쯤에서 적당히 입을 다물었다. 물론 이미 한참 늦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자, 그래서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그런 건가요? 캐묻기 전에 솔직하게 말하는 게 서로 좋을 거예요.”
     “...이건 또 무슨 협박이에요?”
     “그렇게 들린다면,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아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이런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이 누구 때문인지는 꼭 생각해봤으면 싶군요.”
     “내 꿈 내용까지 알아서 뭐 하려고요. 내가 말하기 싫다면요?”
     “나쁜 꿈이 당신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면, 당신을 지켜주고 있는 입장에서 당연히 알 권리가 있는 정보일 텐데요. 저한테 의지하고 있으면서 필요한 정보를 주지 않겠다는 건 저를 너무 당신 편한 대로만 써먹겠다는 심보 아닌가요?”

     이상으로 절대 이길 수 없는 말싸움이 또 시온의 패배로 끝났다. 그는 꿈속에서 말을 할 수 없었던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입이 달려 있으면 뭘 하나.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는데. 어쨌든 클로에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게 뻔했으니, 결국 그는 깊게 한숨을 쉬고 나서 순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짓으로 꾸며낸 부분은 없었지만, 클로에가 그에게 했던 말은 모두 빼고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사실만 이야기했다. 클로에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머리와 몸이 일체형이라는 사실만 빼면, 현실의 클로에는 꿈속의 클로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생각에 푹 빠진 듯이 느릿느릿 말했다.

     “흠... 그래요. 흥미로운 꿈이군요.”
     “이딴 게요?”
     “꿈은 무의식을 반영하곤 하니까요. 당신이 평소에 두려워하던 것이 꿈으로 나타난 게 아니겠나요? 꿈을 통해 당신이 평소에 어떤 점에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추측할 수 있는 셈이죠.”
     “그러니까 내가 평소에 머리통이랑 심장을 양손에 들고 혼자 쇼하는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이네요. 그거 정말 큰 스트레스 요인이겠는데요.”
     “일상을 방해할 만큼 심각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죠. 악몽 때문에 옆 사람 잠까지 다 깨울 정도라면. 당신은 꿈에서 쇼라도 봤으니 못 잔 게 억울하진 않겠지만.”
     “...알았어요. 당신은 빨리 마저 자요. 나는 밖에서 잠깐 생각 좀 정리하고 들어올 테니까.”
     “생각 정리가 아니라 담배 피우러 가는 거겠죠. 안 돼요.”

     어느새 시온의 팔이 클로에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잠깐의 몸싸움이 있었지만, 그는 얌전히 단념하고 자리에 다시 누웠다. 말싸움이든 몸싸움이든 점점 포기하는 속도만 빨라져 가고 있었다. 클로에가 남은 한쪽 손으로 시온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좋은 분위기가 하룻밤을 못 넘기네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참 미안하게 됐네요. 좋은 분위기로 잠든 날 밤에 내가 하필 악몽을 꿔서.”
     “그런 날은 또 올 테니까요. 얼른 자요. 이제 악몽은 안 꿀 거예요.”
     “어떻게 확신해요?”
     “글쎄요. 불안하면 안아줄까요?”
     “...됐어요.”

     그렇게 대꾸는 했지만, 아마 아침에 눈을 뜨면 또 클로에의 품에 안겨 있을 게 뻔했다. 그 사실을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는 했다(수십 년이 지나도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오늘 잠은 다 잤으리라는 예감과 달리,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있으니 곧 무의식의 세계로 점점 가라앉았다. 클로에는 여전히 그의 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클로에는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시온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침 동이 서서히 터올 때쯤에야 얕은 선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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