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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미션 2023. 1. 12. 23:45

     

    1

     처음 만났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잊을 수가 없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전한 설렘 따위는 없었지만, 그는 이 특별한 인연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전날 밤, 그는 자기 전에 담배 피우는 것도 잊고 클로에의 편지를 들여다보며 이 편지지에 손수 글씨를 적어 넣는 클로에의 모습을 상상했다. 오랜만에 죽음의 공포가 아닌 다른 감정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다음 날 처음 만난 클로에의 첫인상은 그 희망을 무참히 부숴놓았다.

     시온은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한 고민만 했을 뿐, 차마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상황까지는 대비하지 않았다. 생명의 온기라고는 한 톨도 없는 대신에 눈이 시려올 만큼 강한 한기가 느껴지는 사람.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 거지? 그는 한 박자 늦게 표정을 다듬었지만, 다 눈치챘을 게 뻔한데도 클로에는 불편한 기색 없이 무뚝뚝하게 고개만 까닥여 보였다.

     짧은 만남 이후로 클로에는 관리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는 복도 벽에 기대어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았다. 별로 설레는 이유 때문인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잠깐 상실했던 현실감이 심장을 쥐고 흔들었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죽은 그의 시체를 쓱 훑어보고 표정 변화 없이 돌아서 자기 갈 길 가는 클로에의 모습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그런 무정한 모습이 클로에의 이미지와 너무 잘 어울려서 아주 자연스러운 환상을 만들어냈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의 미래가 될 환상을.

     그사이에 일을 끝낸 듯한 클로에가 한결같은 무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때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는 변변찮은 재주는 없었지만, 그래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면서 익힌 재주가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온갖 종류의 서비스직을 전전하면서 습득한 ‘웃을 기분이 아닐 때 웃는 법’이라든가.

     “일은 끝난 거예요?”

     그래서 그는 웃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2

     “클로에?”
     “...제 이름 부르는 취미라도 있는 건가요?”
     “줄 게 있어서 부른 건데 그런 반응이면 좀 섭섭한데요.”

     또 이런 식이었다. 시온과의 대화는 종종 이런 식으로 능글맞게 넘어가곤 했다. 편지 내용을 바탕으로 상상한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초췌하고 피곤해 보이는 것이 제법 예상과 비슷했지만, 바로 그다음 날부터는 잘 관리한 듯이 한층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냥 당신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는데, 이거 어때요?”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일까 싶어 쳐다보자 시온이 내민 것은 작은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이었다. 기대는 조금도 한 적 없지만, 생각보다도 더 조촐하고 별것 아니었다. 이런 게 나한테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고? 저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요.”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예쁠 수도 있지.”

     진지하게 거절할까도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빨리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은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았다. 에고 침식으로 인한 식인 충동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시에 찾아오곤 했다. 그걸 통제하는 건 오로지 사용자의 몫이었다. 충동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무직인 시온을 향할 때가 많았고, 이대로라면 언젠가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되도록 자주 안 붙어 있는 편이 좋은데 딱 봐도 말 안 들을 것 같은 이 남자가 협조를 잘해줄지 의문이었다. 마지못해 장식을 받아 든 클로에가 머리카락에 살짝 얹어 보았다. 시온이 이 모습을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면서 말했다.

     “예뻐요.”

     속이 뻔히 보이는 말.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원래도 머리 장식 따위는 잘 하지 않았지만, 침식의 영향으로 인상이 많이 달라진 이후로는 더 멀리하게 되었다. 클로에는 최소한 뭐가 자신에게 어울리고 뭐가 안 맞는지 정도는 잘 알았다. 아마 그 정도의 기본적인 안목도... 사람에 따라서는 가지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게 그의 최선이라면 더 할 말은 없었다.

     마침 내려온 작업 명령을 핑계로 자리를 피하면서 장식은 고민 없이 빼 버렸다. 그럼에도 가는 길에 아예 버려버리지 않고 일단 주머니에 넣어둔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3

     그는 클로에가 작업 명령을 수행하러 간 사이 벽에 머리를 세게 처박았다.

     맨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런 싸구려 장신구를 선물이라고 내놓으면서 헤실거리며 웃는 데도 굉장한 정신력이 필요했다. 

     그게 진심으로 어울릴 거라 생각해서 사 온 건 아니었다. 어찌 됐든 뒷골목에서 고른 것이라 어차피 그리 좋은 건 구할 수 없었지만. 그의 별것 아닌 안목으로도 그게 안 어울린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러니 둥지 출신 아가씨의 눈에는 아마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쯤으로 보였겠지.

     하지만 클로에는 그걸 들어서 비록 건성이었지만 머리카락에 얹어 보았고, 가는 길에는 주머니에 고이 넣기까지 했다. 클로에는 그걸 받지 않거나 냅다 던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테고. 그런데도 그런 쓰레기 같은 선물에 대해 굳이 그렇게까지 해줬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가능성이 보였다. 이런 장난질로 반응을 떠보는 건 꽤 위험한 도박수였지만, 그 대가로 하나의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귀한 둥지 출신 자제분으로부터 아주 조금이나마 특별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건 기묘한 만족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진심으로 살짝 미소지었다. 난이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을 뿐, 공략 불가능한 상대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점에서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곧 올라오는 씁쓸한 마음 때문에 들뜬 기분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지금 하는 일은 뒷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사기극과 다를 게 없었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의지할 구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출발해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사랑. 타인을 배려하기엔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오직 자신의 안정에 도움 될 사람을 찾아서 마음을 주다가 더 좋은 수단이 생기면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설마 그 이기적인 꼴을 그대로 따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지만 그가 뒷골목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배운 건 이런 것들뿐이라.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또 무의미한 가정을 곱씹는 것이다. 만약 둥지 출신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건강한 대책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밖에 못 하는 것도 출신의 한계일까... 클로에에게 들키지 않도록 마음속으로만 해야 하는 약속이었지만, 그는 마지막 양심으로 하나의 약속을 한다.

     이기적인 이유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함부로 끝내 버리지는 않겠다고.

     



    4

     스스로 사람 보는 눈은 제법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시온을 보았을 때, 내향적인 타입이라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건 완전히 틀린 듯했다. 그는 클로에가 눈에 띄기만 해도 다가와서 말을 걸었고, 그 말이라는 것도 대개 중요치 않은 화제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계속 그녀에 대해 알려달라고 졸랐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뭐가 그리도 궁금한 게 많은지.

     “당신도 생산적인 일을 찾아서 해보지 그래요?”
     “사무직이 살아남으려고 발악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럼 스스로 살아남으려는 노력이라도 보이시든가요.”
     “...내가 혼자 살아남을 수 있게 되면 당신은 나 안 볼 거죠?”

     그러다 대화가 또 이쪽으로 흘러간다 싶으면 괜히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클로에는 이유 모를 답답함을 대책 없이 견디고만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답답함을 뭐라고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원인은 확실히 시온에게 있었다.

     “안 보는 게 당신에게 좋을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너무 가까워지려 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예요. 저는 당신이 원하는 걸 줄 수 없어요. 잠깐 대화하면서 당신이 살아남기 위한 요령을 배울 수 있다면 그뿐인 거예요. 만약 당신이 그 이상을 바라고 있다면 서로에게 안 좋은 기억만 남겠죠.”
     “당신은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잖아요. 그렇게 당신이 모든 일을 다 안다는 듯이...”

     그쯤에서 말을 뚝 끊은 시온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끝까지 하라는 뜻으로 계속 쳐다보았지만, 시온은 계속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몇 초 정도 그런 의미 없는 기 싸움이 이어졌다. 결국 이 무의미한 시간 낭비를 참지 못한 클로에가 짧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물론,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그럼, 당신 입으로 말해봐요. 당신은 저에게서 뭘 원하고 있죠?”
     “없어요.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그냥 내 주변에, 눈에 띄는 곳에 있어 주면 안 될까요? 그러기만 하면 내 능력 안에서 당신이 원하는 건 다 해줄 테니까.”
     “당신의 능력 안에서?”

     시온이 깊게 한숨을 쉬려다 도중에 막힌 것 같은 어정쩡한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체감상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쩐지 그 목소리는 조금, 이를 악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당신에 비하면 한참 보잘것없는 능력이지만, 그래도 내가 가진 건 당신에게 전부 줄 수 있다는 뜻이에요.”
     “......”
     “내 마음도 포함해서. 아마 필요는 없으시겠지만.”
     “이해할 수 없군요. 당신이 무언가를 준 뒤에 저한테서 그만큼을 똑같이 받아내지 않으면 당신에게는 손해가 아닌가요? 그리고 저는 절대로 당신이 준 만큼을 돌려주지 못할 거라고, 아까도 말했을 텐데.”

     그리고 또 한참 침묵을 이어가다 고민 끝에 내뱉은 것 같은 시온의 대답은 그날의 대화를 상당히 이상한 분위기로 끝내 버렸다.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손해인 거예요.”

     

     


    5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복도를 꽉 채울 만큼 거대한 입을 벌린 채 천천히 기어 오고 있는 괴물과 마주친 상황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탈출 시 정면에 있는 대상을 무차별적으로 삼켜버리는 행동 패턴]

     정답은 나오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를 악물고 정신을 잃지 않으려 버텼다. 환상체는 곧 환한 빛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고, 그것이 거대한 몸을 질질 끌고 사무직들을 삼켜버리며 이동한 탓에 복도 전체에는 굵고 진한 핏자국이 남았다. 환상체가 사라진 뒤로도 차마 엘리베이터에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 회사에는 여기저기에 그러고 있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인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클로에는 어디 있지.
     $@%시간 전에 ^#$%#&환상체의 작업 명령을 수행하러 간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는 담배 한 개비만 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간절한 마음으로 클로에를 원했다. 품에 넣고 온 숨 가득히 체취를 느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최소한 손이라도 잡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기가 절실했다. 아마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정신이 버틸 수 없을 때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을 만큼 능력 있는 누군가에게 생각을 집중하면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된다. 모든 일이 그 사람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인간이 종교를 믿고 신을 모시는 것도 같은 마음에서 시작되었으리라. 그는 신을 믿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만들지 않는 한 이 땅에 낙원은 없겠지만, 대신 클로에가 있었다.

     그는 시시껄렁한 감정이 아닌 믿음이 필요했다. 정신을 다잡아줄 신앙이 필요했다. 클로에가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당장 이곳으로 달려오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하면 당신이 눈썹을 조금 움직이는 것 말고 다른 표정을 짓게 할 수 있을까? 대체 뭘 하면,
    당신이 나를 조금 더 봐줄까?

     아무 생각 없이 당신을 사랑하는 게
     이 상황을 버텨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까

     

     


    6

     어디에도 시온이 보이지 않아서 한참 찾다가 발견한 곳은 정보팀과 교육팀 사이에 있는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시체도 아니었고, 다친 곳도 없어 보였지만 일종의 패닉 상태인 것 같았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클로에는 아직 사무직의 정신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몰랐고, 시온은 너무 약했다. 주변을 맴돌면서 감시하지 않으면 당장 오늘이라도 금방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불안할 만큼. 어디서 죽든 말든 신경을 꺼 버리면 아주 편할텐데... 하지만 왠지 그러고 나면 아주 오랫동안 후회할 것 같았다. 그 조잡한 나비 모양 장신구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하는 수 없이 짐짝처럼 들고 로비로 이동하는 도중에 시온이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클로에... 어디 있어요?”
     “여기 있어요.”
     “없으면 안 되는데... 이제 당신이 아니면...”
     “왜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내 인생에 이렇게까지 깊숙이 들어왔으면 책임져요... 살아도 당신 때문에 사는 거고 죽는다면 당신이 없어서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죽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곁에 있게 해줘요. 당신 손에는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제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때 로비에 도착해서 적당한 곳에 시온을 내려놓으며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지는 기분은 이런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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