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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나블파 오프레
    커미션 2023. 1. 29. 23:46


     블루파이가 자신의 발령 소식을 들은 건 이상하게도 시나몬을 통해서였다. 마법사들의 도시 팀 배우들에게 미리 다 말해놓고는 기념 파티 계획을 세운 것도 시나몬이었고, 블루파이는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은 어색한 이들에게조차 동네방네 다 소문을 내놓은 것도 시나몬이었다. 아마 그쪽에서도 대체 블루파이가 누구길래 그렇게 난리냐는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어디 갈 때마다 축하한다는 말을 듣게 된 블루파이는 한동안 제법 살기를 띠고 시나몬을 찾아다녔다.

     다행히 그 소식은 사실로 밝혀졌으나, 블루파이는 여전히 시나몬에게 조금 화가 나 있었다. 최근 시나몬과 잠깐 마주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블루파이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대뜸 이렇게 말하고는 빠르게 도망쳐버린 것이다.

     “그 동네는 요즘 잘 되는 동넨데~ 잘됐네요! 우리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잘나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가시면 이제 이 옛날 동네는 기억도 못 하시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이게 그 나름의 심술이라는 걸 알면서도 별로 장단을 맞춰주고 싶지 않았다. 블루파이라고 해서 정든 옛 일터를 두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마냥 기분 좋은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불편한 마음은 이제 마법사들의 도시 팀에서 거의 마지막까지 혼자 남게 된 시나몬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막상 당사자는 그런 마음은 헤아리지도 못하고 심술이니. 하긴 그렇게 고차원적인 심리를 시나몬 같은 이가 이해하리라고는 기대조차 한 적 없었다. 언제쯤 깨닫게 될까? 그런 심술이야말로 이별의 아쉬움을 후련함으로 바꿔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념 파티까지 기획한 당사자가 파티 중반부터는 어쩐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블루파이는 오랜 경험을 통해 시나몬이 어디에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





     블루파이는 동료들 사이를 빠져나와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굳이 사서라는 배역 때문이 아니더라도 블루파이는 책을 참 좋아했다. 시나몬 또한 마술을 좋아했고. 이 게임에 배치된 배우들은 모두 자신의 실제 관심사를 고려해서 고용되었다. 덕분에 다들 자연스럽게도 한 가지에 집중하는 연기가 가능했고, 마치 배정받은 배역의 직업이 실제 자신의 직업이라도 되는 듯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가끔 시나몬 같은 과몰입 환자가 나오는 것만 빼면 괜찮았다. 시나몬은 마술사라는 역할에 너무 몰입해서인지 마술 트릭은 잘 외우면서도 종종 대사를 까먹는 일이 일어나곤 했는데, 이와 관련된 소소한 해프닝이 있었다.

     과거에 게임이 지금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 시절, 시나몬은 몇 달 정도 일일 퀘스트 NPC 역할을 배정받았었다. 세 가지의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하면 대기하고 있던 시나몬이 나와서 그날의 운세를 말해주는 역할이었다. 그때그때 룰렛을 돌려서 정해지는 랜덤 대사는 시나몬이 직접 적었는데, 제대로 운세를 봐주는 대사는 거의 없었다. 어쨌든 그 모두가 기피할 법한 지루한 일에 그는 꼬박꼬박 열심히도 임했지만, 어느 날은 원래 대사를 잊어버렸는지 평소와 조금 다른 말을 해 버렸다.

     “오늘은 조용히 책을 읽으면 어떨까요? 저는 시끄럽다고 블루파이맛 쿠키가 도서관에 못 들어오게 하지만요~ 파하하!”

     정확히는 첫 번째 문장까지가 정식 대사였고 그 뒤는 애드리브였는데, 다른 배우를 언급하는 것까지는 대본에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다행히 스토리에서 아주 초면인 관계도 아니었고 그 정도는 어떻게든 수습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비록 시말서를 쓰기는 했지만, 시나몬이 멋대로 블루파이를 언급해버린 그 대사는 아주 낮은 확률로나마 정식 대사로 추가되면서 일이 마무리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마침 그런 대사도 생겨버린 김에 시끄러운 손님을 쫓아내거나 아예 못 들어오게 하기가 더 쉬워진 셈이었다. 하지만 도서관에 대한 블루파이의 절대적인 권한은 유저가 접속 중일 때 한정이었다. 지금은 엄밀히 말해 도서관 관리인이 아니라 배우 신분이므로 그렇게 강압적으로 나올 수는 없었다.

     “오늘의 주인공 배우님을 위한 마술을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도서관 한가운데서 시나몬이 저러고 있어도 지켜보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뜻이다.

     도서관 안은 어두웠다(햇빛이 없는 도시라는 콘셉트에 맞게 스토리 진행 중에는 불을 꺼두고 있을 뿐, 평소의 도서관은 어둡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희미한 달빛만으로는 책을 읽을 수 없으니까). 어슴푸레한 조명에 비춰 확인해 보니 책들은 가지런히 제자리에 꽂혀 있었지만(책의 무사부터 확인하는 건 역시 직업병일까), 마술에 쓰이는 장미꽃이며 카드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의자 하나를 덩그러니 두고 시나몬이 앉아 있었다. 여러 의미로 가관이었다.

     “마술에는 관심 없습니다.”
     “역시 그러시겠죠? 오, 마술은 생각보다 외로운 취미랍니다. 책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지만, 아니 혼자 읽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마술은 관객이 없으면 의미가 없지요...”
     “저 말고도 이곳에는 관객이 되어줄 사람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둘씩 옮겨가는 중이죠! 그렇게 언젠가 다들 옮겨 가 버리고 나면 여기는 얼마나 쓸쓸해질까요? 마술사만 있고 관객은 없는 게임이라. 그렇게 황량한 광경은 상상도 해본 적 없는데... 아아.”
     “아마 시나몬 씨도 조만간...”
     “그래도 블루파이 씨는 끝까지 여기 있을 줄 알았죠... 최소한 이곳에는 도서관이 있으니까요! 왕국에 가면 블루파이 씨도 어두침침한 도서관 안에서 책만 읽는 게 아니라 파란 하늘 아래서 들판을 걷고 햇빛에 반짝이는 강가를 구경하게 되나요? 그거 좀~? 캐릭터 붕괴 같은데요.”

     말을 해도 잘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계속하는 것은 시나몬의 오랜 단점 중 하나였다. 기이한 것은 그게 수다쟁이 속성으로 어필이 잘 되는 바람에 제법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블루파이는 오랜 시간 책을 읽으며 쌓은 지식으로도 그게 왜 매력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블루파이가 대답하기 전에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조금 깊게, 마치 한숨처럼 들리는.

     “그곳에도 도서관은 있습니다. 이제 그쪽 도서관을 관리하게 되겠죠.”
     “그럼 이쪽 도서관은 이제 방치되겠네요. 유일하게 관리하던 블루파이 씨가 떠날 예정이니... 어디 부탁할 사람이라도?”
     “부탁한다고 해서 제대로 들어줄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실 테죠. 괜찮습니다.”
     “물론~ 저에게 도서관을 맡긴다면 책을 전부 찢어서 장미꽃 접는 데 써버릴지도 몰라요?”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까지 제 뜻에 따르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제 마음대로 하라는 뜻인가요? 참, 관리인답지 않으시게.”
     “배역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군요. 저는 관리인이 아니라 배우입니다. 저는 그쪽에서, 시나몬 씨는 여기에서 각자가 맡은 할 일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디 멀리 떠나는 게 아닙니다. 아마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블루파이 씨도 확신은 없는 거죠. 그게 빠를지 서비스 종료가 빠를지는~?”
     “일찍 종료되지 않도록 거기서 열심히 힘써보도록 하지요.”

     물론 게임의 명운을 일개 배우가 좌지우지할 수는 없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게임의 상황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그저 꿈같은 일일 뿐이었다. 과거의 영광에 대한 미련만 남아있는. 이 게임에서 오래 일한 연기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이 대화도 그리 의미 있는 건 아니겠지.

     “그때까지는 저 혼자 꽤 심심하겠네요~”
     “그렇겠죠.”
     “같이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블루파이는 시나몬의 연기 톤과 일상 톤을 구분할 수 있었다. 후자는 거의 기억나지 않을 만큼 들어볼 기회가 드물었지만, 방금 그 말만큼은 연기가 아닌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전 이거 정리하고 퇴근할 테니 먼저 들어가세요!”
     “마술은요?”
     “어... 하하, 당연히 관심 없으신 줄 알고 따로 준비 안 했는데. 고전적이지만 모자에서 토끼 나오는 마술이라도 간단히 보여드릴까요? 오, 잠시만. 시나몬롤 토끼가 어디 갔죠? 원래 모자 안에 있어야 하는데... 어, 가출이라도 했나 보네요. 그래요, 안타깝지만 마술쇼 일정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네요! 자, 그럼 관객분은 먼저 퇴장해 주실까요. 마술사는 원래 무대 뒤편을 보여주는 게 아니랍니다...”

     허둥지둥하는 통에 차마 말을 더 걸 수가 없어서 짧게 인사하고 도서관을 나섰다. 그때까지 시나몬은 뒤돌아서 바닥에 떨어진 카드와 장미꽃을 정신없이 줍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끝까지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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